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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아아 편안하다 늙어서 이리 편안한 것을

송파나루 2013. 4. 10. 08:17
 아아 편안하다 늙어서 이리 편안한 것을

 

 

 

 


         

        옛날의 그 집 / 박경리

        비자루병에 걸린 대추나무 수십 그루가
        어느 날 일시에 죽어자빠진 그 집
        십오 년을 살았다

        빈 창고같이 휑뎅그렁한 큰 집에
        밤이 오면 소쩍새와 쑥쑥새와 울었고
        연못의 맹꽁이는 목이 터져라 소리 지르던
        이른 봄
        그 집에서 나는 혼자 살았다

        다행이 뜰은 넓어서
        배추 심고 고추 심고 상추 심고 파 심고
        고양이들과 함께 살았다
        정붙이고 살았다

        달빛이 스며드는 차가운 밤에는
        이 세상의 끝의 끝으로 온 것 같이
        무섭기도 했지만
        책상 하나 원고지, 펜 하나가
        나를 지탱해주었고
        사마천을 생각하며 살았다

        그 세월, 옛날의 그 집
        그랬지 그랬었지
        대문 밖에서는

        짐승들이 으르렁거렸다

        늑대도 있었고 여우도 있었고
        까치독사 하이에나도 있었지


        모진 세월 가고


        아아 편안하다 늙어서 이리 편안한 것을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이詩는 박경리님이 남긴 마지막 詩 입니다


                                                                                            모셔온 글
출처 : 草雨
글쓴이 : 헬레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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