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복궁의 뒷간은 28곳이고, 창덕궁과 창경궁에도 21곳의 뒷간이 있었다. 궁궐의 뒷간은 별채로 짓거나, 본채를 둘러싸고 있는 행각 일부에 설치했다. 그런데 왕과 왕비가 사는 내전이나 왕이 공식적으로 신료들을 만나는 외전 등 궁궐의 중심부에는 뒷간이 없다. 그것은 왕실 가족들이 매화틀과 요강으로 용변을 해결했기 때문이다.
궁궐 안의 뒷간은 궁녀, 내시, 노비, 군인 등 궁궐에서 살거나 머물며 일을 하는 사람들이 활동하는 공간에 주로 설치되어 있었다. 궁궐은 한 나라의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이자, 최고ㆍ최대의 직장인만큼 많은 이들이 북적거린 곳이었으니 당연히 많은 뒷간이 있었던 것이다.
분뇨는 귀중한 자원
751년 경 창건된 불국사에는 우리나라에서 보기 힘든 수세식 변기가 있다. 현재 남아있는 불국사 극락전 옆 석재들을 살펴보면, 두툼한 돌 가운데를 참외꼴로 파내고, 그 앞쪽에 구멍을 내어 물을 부어 배설물을 구멍으로 흘려버리도록 만든 구조다. 사찰의 해우소(解憂所)는 텃밭에 뿌릴 퇴비의 생산처였다. 비탈 위에 설치된 뒷간 아래가 채마밭으로, 위에 떨어진 분뇨가 자연스레 거름이 되도록 처리한 것이다. 하지만 우리 역사에서 수세식 변기는 흔치 않다. 대부분의 뒷간은 백제 왕궁리 뒷간처럼 급수 시설이 갖추어져 있지 않고 분뇨가 축적되는 재래식 뒷간이었다. 농민들에게 분뇨가 쌀과 같이 귀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부지런한 농부들은 남의 집에서 똥을 누는 일이 없을 정도였다.
뒷간에 모아둔 분뇨는 거름이 되어 농사에 사용되었다. 뒷간은 쓸모없는 배설물을 버리는 곳이 아니라, 작물을 생산하기 위한 비료 공장인 셈이었다. 그런데 분뇨를 논밭에 그대로 가져다 사용하면 효과가 적다. 뒷간에서 적당히 썩혀야 거름 구실을 제대로 할 수 있다. 농민들은 뒷간에 가득 찬 분뇨를 똥장군과 오줌장군에 담아 논과 밭으로 날라다 뿌렸다. 따라서 재래식(푸세식) 뒷간에는 그것을 쉽게 퍼갈 수 있도록 똥구덩이 위에 긴 나무판을 올려놓았을 뿐 윗면을 다 덮지 않았던 것이다.
잿간과 뒷간
‘똥오줌이 어떻게 농사에 이용되어 왔는가?’의 역사에 대한 조선시대 이전의 기록은 존재하지 않아 알 수가 없다. 분뇨는 처음에는 그대로 농토에 뿌린 후, 한참 후에 토지를 갈아 버리는 방법으로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분뇨를 숙성시켜 비료로 사용한 것은 이웃한 중국의 경우 가사협(賈思勰)이 6세기경에 편찬한 중국 최고의 농업서적인 [제민요술(齊民要術)]에 처음 등장하고 있다. 우리 조상들도 분뇨를 숙성시켜 농사에 이용하는 방법을 받아들여 사용했겠지만, 언제부터 그러했는지는 알 수 없다.
1429년에 정초(鄭招, ?~1434) 등이 편찬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농업서적인 [농사직설(農事直設)]에는 여러 종류의 비료가 소개되고 있는데, 여기에 사람의 똥(人糞)과 함께 똥재(糞灰-똥과 재를 썩은 것)가 언급되고 있다. 조선시대에 가장 널리 사용한 비료는 똥재였다. 하지만 똥재를 만들기 위한 재(灰)는 조선 초기만 하더라도 넉넉하지 못했다.
그런데 17세기 이후 온돌이 널리 보급되면서, 농가에서는 재를 많이 얻을 수 있었다. 일부 농가에서는 재를 모아두는 잿간 한켠에 볼일을 보는 발판을 놓고 뒷간을 겸하게 했다. 용변을 본 후, 잿간에 쌓아둔 재와 왕겨 등을 뿌려 삽으로 떠서 잿간 한쪽에 쌓아둔 후 퇴비로 숙성시켜 쓰기도 했던 것이다. 똥재는 악취도 없고 다루기에 편했다. 따라서 조선 후기로 갈수록 농업에 사용하는 거름의 양이 많아졌다. 또한 19세기에는 똥과 오줌을 별도로 숙성시켜 거름으로 만들면 비료로서의 효과가 크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따라서 조선 후기로 갈수록 똥오줌을 효과적으로 거름으로 사용할 수 있게 되었고, 이로 인해 농업 생산성이 크게 증대되었다. 이렇듯 분뇨는 농민들에게는 보물이었고, 뒷간은 보물창고였다.
똥장수의 등장
1778년 청나라를 시찰하고 돌아온 실학자 박제가(朴齊家, 1750∼1805)는 청나라의 풍속과 제도에 대해 적은 [북학의(北學議)]에서 거름(糞)에 대해 언급했다.
“청나라 사람들은 거름을 금처럼 아끼고, 재를 함부로 버리는 일이 없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성 안에 있는 분뇨를 전부 수거하지 못해 냄새가 길에 가득하다. 분뇨를 수거해 가지 않고, 재를 함부로 길에다 버려 바람에 날려 불결하기도 하다. 시골에는 사람이 적어 재를 구하려 해도 충분하지 않다. 도성 안의 재를 1년만 모아도 몇 만 섬은 되는데, 이를 버리고 이용하지 않는다. 이것은 몇 만 섬의 곡식을 버리는 것과 같다.” |